[나누고 싶은 이야기]엄마에게


엄마에게


엄마, 안녕? 잘 지내시지요?

어버이날을 앞두고 인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뒤집힌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아이들 소식에 가슴에서 불덩이가 솟구칩니다. 안타깝고, 미안하고, 원통합니다. 사고가 난 경위나 구조 작업을 보며 눈물 짓다가 이제는 분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기업이나 정부, 언론이 보여준 모습은 그동안과 별 다를 것이 없어요. 하지만 이번엔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생사의 기로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거짓된 행동과 번복되는 기사를 봐줄 수 없네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종결되는 사건이 늘어날수록 '이번에는 또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절망스럽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개나리도 벚나무도 꽃잎을 다 떨구고 여름을 목전에 두고 있건만, 아직은 냉냉하기만 할 바다의 한기를 느낍니다. 꽉 막힌 암흑의 공간, 발이 닿지 않는 허공, 차디찬 물 위에서 아이들이 생을 마감하다니. 거짓과 불신 그리고 갈등이 만연한 우리 사회는 살을 에는 바람으로 얼어 붙은 겨울공화국입니다.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구호가 한창일 때, 엄마는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아끼며 자식 공부 시켜주셨지요. 여자도 공부해야 대접 받는다며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데 시집가라고 하셨어요. 공부 말고는 달리 할 것도 없었지만, 엄마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했지요. 덕분에 글도 읽을 줄 알게 되고, 뜻도 깨치게 되었어요. 고맙고 고맙습니다. 


오늘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만큼이나 충격적인 일로, 이날까지 학교와 사회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지, 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어른을 공경하고, 남녀가 유별하니 혼전 순결을 지킬 것이며, 부부간에 신의가 있어야 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과 선진 조국의 자랑스러운 일꾼이 되라는 가르침이 기억납니다. 선진국의 언어라는 영어를 배우고, 토요일 밤마다 방송되던 헐리우드 영화를 보며, 경제가 발전하면 저런 세상에서 저런 생각을 하고 살게 될 것이라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대체로 우리 것은 낡은 것이라 생각하고, 서양은 근대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으로 암기되었습니다. 어서 빨리 경제 발전해서 근대화된 조국을 만드는 것이 역사의 발전 경로인 것처럼이요.


하지만 우리는 어떤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상대적으로 더 많이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정직, 승객의 안전을 무시하고 거짓된 안전 검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 선장은 탑승자의 안전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공정, 위기 상황에서 약자가 우선 보호되어야 한다는. 고귀함, 돈과 권력보다 귀한 사명이 존재한다는. 절제, 세상의 자원은 유한하여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협동, 경쟁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생기므로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없다는. 명예, 목숨을 버려야 할 상황에서도 소중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정의, 개인 이익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민주, 시민은 국가 폭력으로부터 주권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런 가치를 이제, 처절하게 갈망합니다.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고, 살아남은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실감에 떨고 있어요. 모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황금 성전은 이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시민 사회가 지지하는 윤리적, 사회적 가치가 있어야 해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통의 경험과 지지가 필요합니다. 그런 반석 없이는 안 됩니다. 


엄마, 죄송해요. 당신이 물려준 세상은 그래도 소박하고 포근했는데, 나는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버이날 선물, 칡즙으로 보냅니다. 술고래보다 여자한테 더 좋은 것이 칡즙이래요. 꾸준히 드세요. 5월 3일 토요일에 내려갑니다. 그때는 정신을 좀 추스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하도록 할게요. 


안인숙 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