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길, 지하철 2호선 당산역에서 환승을 한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당산으로, 당산에서 지하철을 타고 연합회 사무실. 이제는 조금 따뜻한 기운이 돌지만 추운 겨우내 아니, 출근을 시작한 작년 봄부터일까? 6번 출구 계단 아래 사람이 있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 없게 한껏 웅크리고 앉아 있어, 여자인지 남자인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울고 있는지 잠자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바쁘게 지나는 사람의 발걸음은 무심하다. 땅으로 꺼질 듯 한없이 움츠린 그를 편안하게 바라볼 사람은 없으리라.
종종걸음으로 퇴근길에 오르고 당산역 계단을 내려갈 즈음, 어둠 속에 검은 옷으로 둘러싸인 그 사람이 보인다. 얼른 주머니 속을 더듬어 잔돈을 쥐어 보지만, 그 앞에 놓인 은색 깡통에 쉽게 던져 넣지 못한다. 그 곁에 다가갈 때 나는 아무도 우리를 보는 사람이 없길 바란다. 그 조차도 나를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적선'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합정역 2번 출구 일산으로 가는 200번 버스 정류소 옆, 잡지 Big Issue(빅이슈는 홈리스Homeless의 자립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잡지로 판매수익의 절반은 빅판 아저씨에게, 절반은 운영비, 노숙자 교육비, 자활 지원비로 사용한다. 모든 기사와 사진은 재능 기부로 이뤄진다)를 판매하는 아저씨가 종종 나와 있었다. 이제는 당산역 환승 코스로 출근하는 습관이 되어 합정역에는 거의 가지 않지만, 빅이슈를 산 날은 기분이 좋았다. 빅판(빅이슈를 판매하는 홈리스)은 신나는 표정은 아니지만, 웃음 짓고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그의 인사말에 굽신거림은 없다.
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산역이나 합정역에서 주머니 속을 더듬는 목적은 동일하다. 그들의 안녕을 비는 것이다. 하지만 합정역에서는 가슴이 졸아드는 느낌이 없다. 빅이슈엔 스스로 돕는 자와 그를 돕는 자가 있다. 스스로 도왔기 때문에 돕는 자가 생겼는지, 돕는 자가 있었기에 스스로 용기를 냈는지,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는 없다. 합정역 빅판은 혼자가 아니다.
요즘 '빈곤'을 화두로 한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다. 하우스푸어, 워킹푸어(일해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 렌트푸어주택임대료와 보증금 마련 대출 원리금상환액을 합한 것이 소득의 30%를 넘는 세입자에 각종 푸어Poor족(族)이 등장한다. 빈곤한 노후를 보내는 실버푸어, 의료비 지출이 많은 메디푸어 등. 새로운 말이 생겨나는 것은 그것에 대응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는데, 빈곤에 관한 말이 늘어나는 것은 성장의 결실이 블랙홀처럼 어딘가 한 곳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선량한 이웃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먹을거리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줄곧 힘을 써왔다. 먹을거리의 빈곤은 돈이 없어 못 먹거나 좋은 것이 무엇인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먹는 문제를 말한다. 우리는 생협을 통해 좋은 먹을거리에 대해 정의(定義)하고, 조합의 구매력으로 좋은 먹을거리를 구해 올 수 있었다. 다만, 돈이 없어서 못 먹는 문제에서는 자유로웠다. 빈곤문제(먹을거리 빈곤)에 대응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빈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제 빈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곁에 바싹 다가와 있다. 빈곤은 상대적 박탈,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배제를 의미한다. 빈곤의 증가는 사회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이상 징후이다. 그리고 시스템의 문제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며칠 전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신명호가 쓴 『빈곤을 보는 눈』- 한국 사회의 가난에 대한 진실과 거짓에 관한 이야기. 오래전부터 우리사회에 예고되었던 빈곤의 기록을 읽는 것은 부끄럽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빅이슈로 재기하는 노숙인들을 보면 서로 돕고 스스로 일어서는 시도 역시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지않아 곤궁한 자들이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 커다란 이슈거리가 아니고, 그것이 곧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는 이유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경쟁과 승자독식 시스템을 버리고, 협동의 경제 시스템이 우리 것이 되기를! 생활협동조합 행복중심이 그 변화에 중심에 있기를! 이런 바람을 키워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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