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버지가 약주를 한 잔 하시는 날에는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이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고 싶어 도둑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셨다고. 한창 자랄 나이의 배고픔은 배에서 느끼는 통증 그 이상이었겠지만, 아버지는 삶의 과제를 배고픔을 없애는 것으로 표현할 만큼 배고픔에 대한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의 청년기는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어린 여공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과 거의 일치한다. ‘전태일 평전’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발견하고 내 눈물이 두 배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청년의 아버지는 배고픔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너무나 열심히 살았다. 외국에 광부로 간호사로 그리고 군인으로 파견되어 외화를 벌어오고, 경제 개발 계획에 발맞춰 수출의 역군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1인당 GDP 2만 2천 달러의 남부럽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 아버지들의 꿈은 달성된 듯하다. 그런 부모님 덕분에 우리는 다른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패권이나 부패가 없는 민주적인 사회, 개인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갈증이 그것이다. 더불어, 그들이 이룩한 경제 발전을 이어가고 키워 가는 과제도 우리에게 던져졌다.
나는 지금 중국 산둥성에 있다. 중국의 채소와 과일의 주생산지를 둘러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농림부는 한중 FTA가 체결되는 것을 전제로 우리 농민들이 수출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길 희망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칠레, 유럽 경제 공동체, 미국 등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앞으로도 FTA를 통해 국경 없이 자유롭게 상품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수출이 지속적인 경제 발전의 기본 동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경, 청도, 연태, 상해로 이어지는 광활한 채소밭과 과수원을 하루에 서너 시간씩 이동하며 보고 또 본다.
중국은 개혁 개방을 시작한 지 30여년 만에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가진 대국이 되었다. 우리와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없는 상대와 맺은 협정이 어찌 우리 국민과 우리 경제에 유리할 수 있을까? 중국은 품질 낮은 저가 상품을 수출해야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언제든 한국 시장을 흔들어 버릴 수 있는 경제 대국이다. 공산국가이면서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대륙의 상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수출길을 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중국 역시 가난과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민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시장 경제를 수용하여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우리처럼 이들도 일견 성공한 것이리라. 그러나 지독한 빈부 격차, 일당 독재, 비민주적 사회 분위기가 그들의 경제 발전의 빛을 잃게 만든다. 1자녀 갖기 정책 때문에 호적에 등재되지 못한 소녀들이 수천만 명이 된다고 한다. 그 소녀들은 교육은 물론 어떠한 사회적 혜택도 받지 못하고,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어제 식당에서 서빙하던 소녀가 바로 그 사람은 아닐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하는 중국 인민이나 우리 아버지들의 바람이 다를 리 없다. 그리고 그 바람이 기대한 것은 나만 배부르게 먹는 그런 세상은 아니었다. 이밥과 고깃국을 살 수 있는 ‘돈’만이 최고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박한 바람을 성취해 온 과정이 잘못된 것일까? 계속해서 크게 불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경제 발전’이라는 굴레를 물려 받았고, 함께 잘 사는 길을 만들지 못했다. 이밥과 고깃국을 배불리 먹어도, 이 굴레는 얼마나 무거운지 웬만한 힘으로는 굴리기 어렵다. 굴레를 내려놓고 다른 길을 찾는 것, 아직 늦은 것은 아니겠지.
며칠 동안 접시에 담긴 밥을 받았다. 식어 버린 길쭉 쌀밥은 내 몸을 덥혀 주지 못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갓 지은 따듯한 이밥에 김치 한 쪽을 얹어 먹고 싶다.
안인숙 행복중심생협 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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