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씨앗

바써 바써? 이 말이 무슨 말일까? ‘바서 전시회 봤어?’를 줄여 말하면 ‘바써 바써?’가 된다. 2010년 서울에서 훈데르트 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년~2000년) 전시회가 열렸다. 그 전시회에 다녀온 지인이 한 말인데,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을 찾아보니 강렬함 속에 담긴 부드러움이 매력적이었다.


바서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며 곡선의 건물을 짓고, 건물과 대지가 끊김 없이 이어지는 특이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건물에 나무와 식물 등 자연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며 옥상과 창문에 식물을 자라게 한 그의 생각은 지금은 보편화 된 옥상정원의 시초나 다름없다. 자연의 다양성을 상징하듯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창문들도 인상 깊다. 그림은 강렬한 자연의 원색을 사용하며, 풀과 흙, 거름을 형상화했다. 강렬한 색채로 말한다면 단연 고흐가 떠오른다. 고흐가 이해받지 못한 개인의 비애와 배제당한 사람들의 경건한 삶을 붓으로 노래했다면, 바서가 느낀 것은 정치적인 것이었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태인이란 이유로 친척이 70명 가까이 몰살되고, 삶의 터전이 온통 폐허가 된 가운데 그는 절망한다. 그를 평화와 자연을 노래하는 예술가로 만든 것은,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은 전쟁의 잔해 속에 피어난 들풀이었다. 돌무더기 틈, 한 줌도 안 되는 흙 속에서 피어난 푸른 잎에서 그는 허무와 비탄으로부터 생명에 대한 외경과 평화에 대한 갈망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화초 가꾸기는 일종의 치료법이다. 손끝으로 살짝 문질러도 으스러지는 연약한 잎이지만, 흙, 바람, 물만 있으면 하루하루 자라나는 씨앗이 살아있음과 살아감에 대한 엄중함과 감사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자본 시장 안에서 씨앗을 살펴보면 없던 우울증도 생겨날 판이다. 씨앗은 지금 전쟁터가 되었다. 생명은 자본 앞에서 자원이라 불리고, 생명의 비밀이 담긴 DNA는 자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실험실에서의 육종, 종(種)간의 경계를 넘어 유전자를 조작하는 기술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가진 것 모두 변형의 대상이 된다. 기업은 식물 신품종을 개발하여 로열티를 받고, 유전자 조작생명체(GMO)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행사해 돈을 번다. 10개도 안 되는 소수의 다국적 기업이 세계 종자 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한국에는 농우바이오와 동부팜한농 두 회사가 있지만, 알짜배기 씨앗들은 다국적 기업의 손에 넘어간 지 오래다. 80년대에 토종 고추와 태국 고추를 교배하여 신품종인 청양고추를 개발한 중앙종묘는 IMF 때 멕시코 회사에 매각되었고, 이를 다시 몬산토가 인수했다. 10년간 우리가 몬산토에 지불해야 하는 로열티가 8,000억 원이다.


씨앗은 수 천년 동안 여러 사람에 의해 개량되고 이어져왔다. 씨앗은 농사짓는 사람, 농민의 것이었다. 거기에 한 번의 개량을 했다고 씨앗에 대한 특허를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겨난다니!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의 모순이 여기에 있다.


4월, 우리는 ‘토종씨앗지키기’ 기금을 모금(자세히 보기)한다. 토종씨앗을 지키기 위해 6년째 노력하고 있다. 밭에서 씨앗을 개량하고, 좋은 씨앗을 골라 품질과 생산량을 늘여가는 농부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한다. 우리 땅 우리 기후에 맞는 토종씨앗을 다국적 기업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 횡성과 홍천에 2개의 채종포를 경작해서 작년에는 230kg의 씨앗을 얻었다. 2015년에는 행복중심 진주생협, 행복중심 진해생협이 여성농민회와 함께 함안 채종포를 개장한다. 





단기적으로는 행복중심생협의 수만큼 채종포를 늘여가고,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토종씨앗이 시민의 힘으로 되살아나서 로열티 없는 우리 씨앗이 되고 우리 밥상에 오르기 까지,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안인숙 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