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부야오 여성들에게 재봉틀을!


지난 연말에 필리핀에 다녀왔다. 아시아브릿지라는 단체의 필리핀 실무자가 인도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하여 축하해주러 몇 명이 어울리게 되었다. 필리핀 방식의 결혼식도 보고 싶었지만 사실은 필리핀의 멋진 바다가 다시 나를 부른 것이었다. 지난 번 멕시코 여행에서 실패한 바닷가 휴식을 이번엔 꼭 제대로 해 보리라.

마닐라에서 3시간 정도 걸리는 결혼식장에 가기 전에 아시아브릿지에서 지역 활동을 하고 있는 ‘까부야오’에 들르게 되었다. 한국의 차관을 얻어 도시철도를 건설한다고 기존 철로 주변에 형성된 빈민 거주지를 먼 곳으로 집단 이주 시킨 곳이다. 70년대 우리나라의 난지도나 상계동 같은 곳이다. 필리핀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쓰레기더미와 빨래들. 그래도 도시의 빈민지역과는 달리 여기는 좀 더 차분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아시아브릿지의 공부방에서 지역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물을 정수해서 판 수익금으로 장학금을 조성하는 정수공장, 여성들이 파자마나 이불 커버 등을 만들어 파는 여성일감사업 등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방문한 곳에 대한 예의로 몇 마디 물어보다가 나는 곧 가난을 딛고 일어서려는 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내가 평생 사랑해 온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할 생각까지 했으니 기특하기만 하다. 



까부야오를 떠나면서 이들과 함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공부방에게는 제3세계의 저소득층 청소년 지원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의 장학재단을 소개해 주었다. 정수공장은 작년 10월에 문을 열었는데, 깨끗한 물을 가까운데서 사 먹을 수 있어서 주민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은행대출을 받아 시설은 만들었지만 운영자금이 딸린다. 특히 정수한 물을 운반할 물통이 부족하단다. 플라스틱 말통 만한 것인데 아래쪽에 수도꼭지가 달려 있다. 우리 돈으로 4천 원 정도. 지난 1월 동안 나를 만난 사람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1만원을 기부당했다. 집에 오신 손님은 물론이고 동생의 명상수련 동료들, 중학교 교복을 맞추고 온 후배의 딸, 세뱃돈을 받은 조카들까지.... 물통값으로 50만원이 모아져 보내주었다. 이 돈으로 100개 좀 넘게 사면 당분간은 쓸 수 있겠지. 

그동안 파자마나 매트리스커버 등을 만들어 팔아서 수익금을 모으고 있는 여성들은 이 일이 더 활성화되려면 좀 더 고급스러운 작업을 할 수 있는 5실 재봉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지금 쓰는 것은 1실 재봉틀로 흔히 말하는 오버로크(가위질한 부분이 풀리지 않게 하는 작업)를 못하니까 파자마 어깨선이나 엉덩이 부분 등 처리가 어렵고 단춧구멍도 손바느질이라 투박하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거야말로 민우회생협이 관심 가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재봉틀을 지원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들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가난을 극복할 힘을 주고 또 다른 일들도 함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은 필리핀이라면 멋진 바다나 풍경 같은 걸 생각할 텐데 왜 우리 눈엔 이런 게 먼저 보이는 걸까요?” 같이 갔던 경화 씨가 내게 속삭인다. 머물 시간은 짧고 비도 오고 이번 여행도 바닷가에서의 휴식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더 뿌듯하다. 
재봉틀에서 시작되는 아시아 자매들의 연대!  멋지지 않을까?  

박영숙 민우회생협 활동 20년, 이제 농사꾼이 된 전 여성민우회생협 이사장. 시민지원농업의 하나로 '시골맛보따리(www.cafe.daum.net/sigolmat)을 운영하고 있다.